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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눈에 띄는 표지다. 핑크색과 글씨체가 매우 과할정도로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아니라 소녀?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양자역학의 불완전성을 비판하기 위해 에르빈 슈뢰딩거가 고안한 사고실험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양자역학을 묘사하는 대표적인 실험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양자역학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친숙하게 대하는데 큰 기여를 한 이론이다. 특히 소설,영화,만화 등 여러매체에서 이제는 단골소재로 쓰이는 상황인데, 이번엔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아니라 슈뢰딩거의 소녀다. 이제 저 소녀도 50%의 확률로 살아있는 상태와 죽은 상태가 중첩되는 내용인 것일까?

현대 일본에서 50여년이 지난 근미래의 일본. 도쿄 대신에 도키요라고 부르고, 약자컴퓨터의 발달로 모라벡이라는 어시스턴스 ai가 보편화되었으며, 어딘가 Z월드를 떠올리게 만드는 Z감염체가 떠도는 세계. 수공예를 좋아하는 발랄하고 솜씨 좋은 구레나이는 아버지에게서 프렌드 ai를 선물 받았고, 자신과 색만 다른 옷을 똑같이 입혀주고 '아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그렇다. 표지에 나와있는 분홍색 소녀가 구레나이, 파란색 소녀가 그녀의 경호원이자 개인교사이자 비서이기도 프렌드 ai 아이인 것이다.

오늘 시부야의 감염발생확률이 80%라는 양자컴퓨터의 예측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오늘만큼은 집을 벗어나 마누스의 수공예품을 쇼핑하고 싶은 구레나이가 아이와 함께 매장에 방문하여 같은 마누스의 매니아인 할머니를 만나서 실컷 서로의 취미를 공유하며 즐긴다. 그러다 Z감염체가 출연하였고 아이는 두 사람을 데리고 도망치면서 멋지게 감염체 세 마리를 제압하였으나, 불운하게도 같이 있던 할머니가 뒤늦게 증상이 발현되어 구레나이를 뭄으로써 구레나이를 지키는데 실패하고 만다. 아직 사람으로써 죽고 싶었던 구레나이는 아이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명령하지만, 제1원칙(로봇은 인간을 해할 수 없다)에 위배되어 이는 불가능했다. 그러던 중 아이는 교묘하게 자살을 도와줄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을 제안하는데, 그것이 바로 '양자 자살'이다. 이름 한 번 기이하다.

 

평행우주 이론을 토대로 만들어진 5D체스. 다른 평행우주의 말을 가져올 수 있다. 대신 분기가 발생한다

 

슈뢰딩거 고양이에 대한 다세계 해석은 평행우주론의 시작

아이는 다세계 해석에 따라서 1초마다 50%확률로 실탄이 발사되는 권총 방아쇠를 구레나이에게 당길 때마다, 세계는 둘로 분열된다고 말해준다. 이를 100초 동안 반복하면 총 100개의 평행우주가 만들어지고, 죽는 순간에는 관찰자인 구레나이가 자신의 죽음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반드시 자신을 관측하는 시점의 구레나이는 살아있다고 말한다. 즉, 관측에 성공하는 세계선이 존재하므로 제1원칙을 회피하면서, 동시에 나머지 세계선에선 구레나이를 죽임으로써, 자살시켜달라는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굳이 권총으로 쏘지 않아도, 오늘 시부야를 오지 않았던 세계선, 롤리타풍의 수예를 취미로 삼지 않는 세계선,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세계선, Z발병체가 없는 세계선 등 수없이 많은 세계선이 존재한다고 말해주고, 작가는 이 중 몇 가지 세계선을 보여주며 이야기는 마무리 된다.

사람은 누구나 선택의 기로에 언제나 서있다. 오늘 점심은 무엇으로 먹을지, 우산을 가지고 나갈것인가와 같은 작은 선택도 있고 구레나이처럼 신주쿠에 갈지말지, 어떤 종목을 구매할지, 진로선택에서 어떤 길을 나아갈지, 이 사람과 헤어져야할지와 같은 중요한 선택들도 있다. 그리고 대체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저런 중요한 갈림길에서 다른 선택한 것을 두고 후회하거나 좌절하거나 혹은 안도하기도 한다. 필자 또한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남들과 비슷한 삶을 살지 않았을까? 이 선택을 했더라면 우리 집이 더 나아졌을텐데와 같은 후회와 고민을 끊임없이 한 적이 있고 그러한 번뇌는 들인 시간에 비례하여 해소되지 않았다.  

 

여주인공을 살린다는 아주 낮은 확률의 세계선을 위해 시간을 되돌리는 내용의 애니메이션, 슈타인즈 게이트

 

우리는 슈뢰딩거의 고양이 

이런 나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다세계 해석은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지 않을까 싶다. 회계사라는 시험을 고르지 않았던 세계선에서의 나는 평범하게 취업해서 그 삶에 만족했을 것이고, 코인에 손대지 않았던 세계선에서는 무난하게 수험생활을 마치고 회계사가 되어서 열심히 일하며 살아갔을 것이다. 저렇게 했어봐야 망했을 것이다 라고 신포도처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선택을 해서 성공한 혹은 행복한 세계선을 사는 내가 존재하고 그것들 또한 나라고 믿는 것이다. 수많은 세계선에서 행복하게 사는 '나'들이 있으니 비단 지금의 '내'가 그렇게 불행하다고만 볼 수 없다.  마치 구레나이를 죽였지만, 살아있는 세계선이 존재하기에 제1원칙을 어겼다고 볼 수 없는 아이의 행동처럼.

반대로 미래도 가능하다. 아침에 늦잠을 잘건지 말건지, 저녁에 러닝운동을 할건지 말건지에 따라서도 분기되어 게으른 나와 부지런한 나, 살 뺀 나와 살 찐 나가 모두 존재할 것이다. 그렇게 하루하루 작은 선택들을 선택해나가며, 마침내 마지막에는 회계사에 떨어지거나 포기하는 수많은 세계선이 아닌, 적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합격한 세계선에 도달한다고 믿고 행동하는 것.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수년간 생긴 후회와 고민이 조금은 줄어들었다. 저기서 회계사란 단어 대신에 각자가 생각하는 중요목표로 치환해서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져보자. 정신승리, 단순긍정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해서 자신이 목표하는 삶에 가까워진다면 그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나 다름없다. 여러가지 가능성과 경우가 중첩되어 있는 상태라는 것이 공통점이다. 고양이와 다른 점은 우리들의 여러가지 상태는 계수기와 방사선의 붕괴확률(50%)에 따라서 관측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발생하는 작은 분기들을 선택하는 우리들의 행동, 의지, 결정에 따라서 확률이 정해지고, 직접 관측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아이가 말했듯이 자신을 관측하는 시점의 나는 살아있다(=달성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의외(?)로 슈뢰딩거의 고양이 보다 앞선 영조의 세자실험

 

이과적 내용들을 어렵지 않게 다룬 SF 디스토피아 단편집

오늘 이야기한 것은 '슈뢰딩거의 소녀' 였지만, 이 책은 마쓰자키 유리 작가의 총 6개의 단편모음집이다. 근의 공식만 외우고 수학을 싫어하는 수포자의 이세계탈출기 '이세계 수학'과 65세에 모든 인류가 죽는 세상에서 64세 할머니와 소녀의 우정을 그린 '예순다섯 데스'도 무척이나 재미있다. 오히려 순수재미로만 따진다면 이 쪽이 더 높았고, 나머지 이야기들도 대체로 가볍게 읽을만하다. 다만 마지막의 '펜로즈의 처녀'는 다소 어려운 점도 있었으나 그럼에도 꽤나 흥미롭게 읽었다. 이 책의 저자 또한 심층있게 이론을 다루기보다는 과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한 재미난 SF 디스토피아를 만드는 데에 집중했으므로, 이과적 단어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 책을 멀리할 필요는 없다. 너무 화려한 책표지에 위화감을 느끼지 말고 꼭 집어서 보자. 하루가 아깝지 않을만큼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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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꿀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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