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읽은 단편집들 중에 호불호가 가장 큰 책이라고 생각한다. 재밌는 작품은 정말 재밌고, 참 기발한 SF를 썼다고 생각이 들다가도, 어떤 단편집은 이번 건 그냥 정제되지 않는 상상력(이라 쓰고 난잡함)을 그대로 옮겼구나 하고 스윽 넘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좋은 몇몇의 단편집 때문이라도 누군가에게 추천해줄만한 책이다.
<목소리를 드릴게요> 내 목소리가 주변 사람을 살인자로 만든다면
단순히 교단에서 여러 학생들을 가르치기만 했을뿐인데, 그 목소리를 6개월 이상 꾸준히 들으면 살인자로 만든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어떻게 해야할까? 살인교사죄로 당장 체포해야할까? 아니면 이 사람이 한 행위가 아니니 무관하게 사회에 냅두어야할까? 근미래의 대한민국은 이렇게 남에게 영향을 주는 '괴물'들을 납치하여 수용소에 가둔다. 그치만, 죄수처럼 대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는 그들에게 유한한 지원을 해주면서, 성대수술만 한다면 다시 내보내게 해준다는 제안까지 제시한다. 이러한 능력도 꽤나 흔한 소재지만, 이러한 능력자들끼리 모여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들은 상당히 안정적인 재미를 준다. 괜히 대표작이 아니다. SF에 익숙하지 않은 대중들도 쉽게 재미를 느낄만한 단편집이다.
<리틀 베이비블루 필> 평생 기억을 잊지 못하게 만드는 알약이 있다면
<블랙미러> 에도 이와 비슷한 에피소드가 있다. 눈에 녹화, 재생이 가능한 칩을 넣는 것이 상용화되면서 일어나는 일련의 내용을 담은 에피소드가 그러한데, 소재나 전개가 매우 유사했지만 그 묘사가 사회, 국가로 더 크게 나타냈기에 재미 또한 배가 되었다. 자꾸 잊어버리는 치매노인들이 충격적인 배우자의 죽음은 잊지않고 또렷히 기억한다는 것에서 착안하여 개발된 알약. 그러나 처음의 의료용 목적사용과는 다르게 학생들에게 퍼져, 컨닝 아닌 컨닝을 가능하게 했고, 그 다음엔 사랑의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려는 연인들, 영화의 명장면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영화애호가들에게 퍼지더니, 많은 분야에서 각각의 이유로 오남용되었고, 결국엔 인지장애의 부작용이 한 세대 뒤에 나타난다는 이야기. SF를 많이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정말 자극적이면서 재밌는 작품이다.
페미니즘 작품들이 별로인 이유
지금까지는 재밌는 작품에 대한 칭찬이였고, 사실 이 다음이 하고싶은 말이다. 1주일 전에는 페미니즘 작가의 단편선을 읽었고, 2주 전에는 평범한 일본작가의 SF 단편선을 읽었다. 그리고 오늘은 페미니즘 작가의 SF 단편선을 읽었다. 정세랑 작가는 검색해보니 꽤나 유명한 페미니즘 작가였지만, 이번 단편집 <목소리를 드릴게요> 에는 페미니즘을 제외한 SF만 모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이 페미니즘이란 걸 알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최근에 읽은 단편선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느끼면서 페미니즘 색채가 담긴 작품이 왜 별로인지 이제서야 납득했다.
첫번째, 남성에 대한 혐오묘사의 유무
2주 전에 읽은 <슈뢰딩거의 소녀>에서는 대부분의 화자가 여성이였음에도, 악랄한 남자 악당이 등장했음에도 전혀 페미니즘 소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실제로도 작가는 페미니즘과 전혀 연관이 없는 사람이다. 그야 그럴것이 그(녀)는 남성을 혐오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순다섯 데스>에는 뇌물을 받아먹는 남성, 상대를 악인으로 간주하고 아이의 보호자를 죽여버리는 남성이 등장하지만 정말 그 뿐이다. 혐오가 느껴지지 않는다. 반면, 정세랑 작가와 장류진 작가의 단편집에는 남성에 대한 혐오가 조금씩 묻어났다. <후쿠오카 가이드>에서는 예쁜여자와 자는 것을 트로피처럼 여기는 남성, <11분의 1>에서는 능글맞게 순진무구한 유경이를 이용하는 남성, 쭈뼛쭈뼛이 기본모드이고 끼룩끼룩 꽥꽥 거리는 남성들이 나온다. 일본 작가는 개연성을 위한 남성들의 설정이였기때문에 혐오가 느껴지지 않았지만, 한국의 두 작가들의 묘사에는 평소 페미니스트들이 혐오하는 남성에 대한 묘사가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혐오가 느껴졌고 덕분에 재밌게 읽다가도 반감을 갖게 만든다.
두번째, 독자를 가르치려 든다
허영만의 <식객>이 참 재밌지만, 그렇다고 최고의 작품이 아닌 이유는 어줍잖게 가르치려 들기 때문이다. <파묘>가 천만영화일정도로 재밌지만, 최고의 작품은 아닌 것이 어줍잖은 반일정서를 담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페미니즘 작가들도 나름 재밌는 작품을 내긴하지만, 최고가 아닌 이유는 어줍잖게 가르치려 들기 때문이다. <82년생의 김지영>이 엉터리 통계와 짜집기 논문으로 막간마다 쓴 것이 그러하고, 여성의 억압과 생태계의 위기를 다같이 가부장적 남성문화의 산물로 보고, 지금까지 서구 근대가 무시했던 부분을 생태·여성적 시각으로 다시 보자는 '에코페미니즘'의 색채가 담긴 <리셋>이 그러하다. 환경이라곤 고작 지렁이가 플라스틱과 스티로폼 먹는 것 정도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환경을 논한다는 게...참으로 가볍다. 게다가 정말이지 비겁한 점은 정작 과학서적, 환경서적에서 근거와 실험, 논문을 바탕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글, 그림, 영화 등 자신과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들을 수 없는 일방향에서만 저렇게 메시지를 전파하고 그 뒤의 논박은 아예 무시한다는 것이다.
세번째, 페미니즘이 강할수록 유치하다
이세계물이라는 장르가 있다. 현생에서 실패한 삶을 사는 남자 주인공이 트럭에 치여서 다른 세상에서는 훌륭한 용사가 되어 마왕을 무찌르고 예쁜 여자 동료들에게 둘러쌓여서 하하호호 한다는 전형적인 먼치킨 뽕빨물이다. 물론 이런 장르가 나쁘다는 것도 아니고 즐기는 사람이 이상하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상대방을 수준이하의 사람으로 그리거나, 별것도 없는 주인공에게 능력있는 사람들이 빌빌기는 꼴을 쓰는 것은 솔직히 말해 유치하다. 사람이 유치하다는 게 아니라 작품수준이 현저하게 내려간다. 가상의 허수아비를 만들어놓고 때리 것이나 다름없다. <후쿠오카 가이드>에서 몸짱 영업짱 외모짱 인간관계 좋은 지훈이 어째서인지 이혼녀 지유 앞에서 감탄만하고 침 질질흘리는 원숭이가 되어버리고, <11분의 1>의 뛰어난 사업가인 김남선 선배와 다른 뛰어난 연구원인 9명의 선배들은 첨단과학의 최전선에서 연구하는 뛰어난 수준이지만, 기선이 좋아하는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능력도 없는 유경이에게 모든 결정권을 넘기고 빌빌긴다. 개연성이고 핍진성이고를 떠나서 너무 유치하다 못해 측은하기까지하다. 페미니즘 관련 토론에서 페미니즘 측은 단 한번도 오세라비나 이준석을 이기지 못했다. 그래서 이렇게 멍청한 허수아비를 만드는 것에 집착하는 것일까?
좋은 작품은 작품 외적인 것에 영향을 받지 않아야한다
정리하자면, 페미니즘 색채가 강한 작품은 남성혐오가 묻어있어서 다소 반감이 드며, 얕은 지식과 짧은 식견으로 독자를 가르치려들려고 해서 별로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참고 보려고 해도 작품자체가 유치해서 재미마저도 떨어진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페미니즘 색채가 짙은 작품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장류진의 <잘 살겠습니다>를 읽고서, 계산적인 여주인공을 계산없이 남을 응원하게 만드는 빛나언니의 모습에 조금은 뭉클했고, 정세랑의 <리틀 베이비블루 필>을 읽고서, 정말 이런 약이 개발되면 이렇게 흘러가겠구나 생각하며, 작가의 전개와 묘사에 감탄했다. 페미니즘 색채만 버리면 얼마든지 재밌고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 동안 정치권력과 결부하여 대한민국의 남녀갈등을 만들어 파국을 만들어냈던 페미니즘이 이제서야 질타를 받고, 그간 해왔던 행적들이 상당히 부끄럽고 백해무익하다가는 것이 사회의 분위기로 잡아가고 있다. 그러니 작가분들도 굳이 수준낮은 작품보다는 그 자체로 재밌고 좋은 작품들을 써내려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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